매년 요맘때쯤엔 꼭 감기에 걸리곤 하는데 올해도 어김없다 싶을 정도로 정확히
찾아 오셨습니다. 가족들이 절 버리고 매정하게 외출하였으므로 혼자 끙끙대다가
한계치까지 부어오른 편도때문에 음식물을 넘기는건 고사하고 호흡을 하는것마저
곤란해져 약을 사러 나가기로 결정했어요.
아마, 아니 분명히 펄펄 끓던 열 때문에 그랬던것 같습니다.
머리가 산발이길래 무언가 묶을걸 찾아 뒤적거리다가 동일한 디자인의 머리고무줄
두개를 나란히 찾았을때 저는 보통의 성인 여성이라면 꿈도 꾸지 않을 만행을 그만
저질렀지요.
양갈래 포니테일을.
아직 10월이 채 가지도 않았지만 밖은 쌀쌀하고 감기일땐 역시 뜨뜻한게 좋겠다
싶어서 겨울옷장을 열어서 매우 때이른 더플코트까지 걸치고 열에 들뜬 벌건 얼굴과
불안한 발걸음으로 출발.
발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근처 대형 약국에 들어갔어요. 바로 진열대에 놓여 있는
타블로이드 표지를 쓱 보곤 이놈의 브리트니는 애들 생각 해서라도 어여 정신 차려야
할텐데 라고 생각한 순간 누군가가 '어이-' 하면서 등을 툭하고 치는 것이었어요.
아, 계산미스다.
설마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될줄이야.
피가 급속히 식어서 혈관이 오그라드는 이 기분.
후다닥 머리고무줄을 빼버리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굴고싶다는 유혹이
찾아왔지만 나에겐 하고싶다면 스무살이 넘어도 양갈래 머리를 할 권리가 있어!
라고 생각하며 굳은 미소와 함께 뒤돌았습니다.
절 이렇게 절망의 구렁텅이에 밀어넣은 주인공은 바로 못해도 최근 3년간은
소식을 들은 적 없던 아는 오라버님. 왜, 어째서, why, pourquoi, 지금 이 순간
여기 계셔야 하는건가요.
묘하게 과장된 말투로 오랜만이라는 둥, 요번 감기가 아주 독하다는 둥 하고
있는데 이 양반께서 대화를 시작하는 대신 미간에 얇은 주름 두가닥을 잡고 절
응시하다가(...그렇게 안봐도 이상한거 알아!) 뜬금없이 한마디를 툭 던졌습니다.
"너 지금 딱 토오사카 린 이다."
이건 내 인생에서 가장 예상치 못했고 허를 찌른 순간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아마 무너져 있던 탄광에서 구출해낸 광부가 갑자기 삽과 함께 탱고를
추기 시작함을 목격한 구조대원의 기분과 엇비슷 할지도 몰라요.
두만강 저편으로 둥실둥실 흘러가려는 정신을 붙잡고 저는 최대한 단호하게(그러나
목이 부어있어서 효과는 제로) 대답했습니다.
"어째서? 토오사카는 반묶음이라 뒤에도 머리가 있잖아요.
난 이렇게 (양 포니테일을 잡고 휙휙) 딱 반반 나눠서 묶었어요. 달라요."
"...누군지 아는거야?"
"...응."
흐르는 침묵이 무거워서 뭐라도 억지로 말하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마침 아마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오라버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어요.
한참을 낄낄거리다가 감기엔 잘 먹어야 한다며 옆 커피숍에서 사주신 핫초코와
치즈케이크를 감사히 먹고 집에 돌아와보니 정작 약을 안 샀다는걸 깨닳았지만
배부르고 따뜻하니 기분이 좋아서 그냥 꼬물꼬물 침대로 기어 들어 갔습니다.
다음에는 양갈래 피그테일로 할까봐요 :)
1.
토오사카 린이란 Fate/Stay Night 란 게임에 나오는 아가씨로 대충 이러한 모습을
하고 계십니다.
양갈래 묶음과 붉은계열의 긴 코트가
(만) 비슷했을지도 모르겠어요.
2.
그런데 오라버님, 만약 제가
'그게 누구에요?' 라는 반응이었다면 어쩌시려고(...)
아마
'아아, 일본 연예인이야.' 하고 넘기셨겠겠고 난 연예인 닮았다는 소리에 기분이
좋아져서 웃음을 속으로 참았을거라 생각하니 뭔가 대단히 착잡.
3.
고등학교때 양갈래 머리를 하고 가면 친구가
'치요다! 어서 날아봐!' 하곤 했는데
몇년사이에 토오사카까지 업그레이드 했다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이것이 바로
장족의 발전.
정진 하겠습니다!
4.
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