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안 어울릴지도 모르지만 요리하는걸 굉장히 좋아합니다.
특히나 늘어진 찹쌀떡처럼 담요에 들러붙어 있는 초등학교 1학년짜리를 등교시켜야
하는 저희집 아침풍경 덕분에 조식은 각자 챙겨먹지 않으면 국물도 없거든요.
가장 자주 먹는 것은 오트밀, 그러니까 귀리죽.
요즘이야 상자에서 쓰륵 부어서 우유와 함께 먹는 시리얼이 제일 흔하다고는 해도
전통적으로 서양의 아침식사라고 하면 역시 미묘한 가난함의 냄세를 풍기는 오트밀.
뜨거운 물만 붓거나 전자렌지
3분이면 완성되는 오트밀이
편하기야 하지만 사실 저렇게
미리 포장되어 있는 것들은
빨리 익으라고 오트밀을 잘게
부셔 둔데다가 백설탕을 비롯
첨가물도 많이 넣는 편이라서
별로 좋지 않아요.
아니, 그런걸 다 따지지 않아도
맛이 훨씬 떨어져요.

이것이 Rolled Oats 인데 통귀리를 살짝 굽거나 찐다음에 롤러로 납작하게 민것. ▶
물에 넣고 끓여서 완성 될때까지 15분 정도 걸리지만
퀵 오트밀보다 영양가도 높고 맛도 더 구수해요.

▲ 하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고 오트밀 애호가 (믿거나 말거나 존재하고 있어요!)
사이에서도 가장 사랑받고 있는건 역시 Steel Cut Oats. 단순히 통귀리를 서너조각으로
쪼개둔 것으로 다 익는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식감이 가장 뛰어나요 :)
쫄깃쫄깃 하거든요.
여담이지만 이쪽이 훨씬 싸기도 해요.
벌크로 산다고 하면 1kg를 2000-3000원이면 살 수 있는데 제가 한번 끓여먹을때 40g
정도씩 사용하니까 한달이나 먹을 수 있지요. 왠지 화려하게 먹고 싶은 날에는 토핑을
올릴 수도 있는데 꿀이나 건포도, 블루베리를 올린다고 해도 한끼식비 300원(...)
아침에 미적미적 일어나서 창밖을 보니 하늘은 세번쯤 재탕한 사골국 색.
매일 먹는 오트밀이라도 뭔가 거창하게 치장시켜주고 싶은 그런 느낌.
그 어떤 영양사라도 울고 갈 완벽한 예술품을 창조하고야 말겠다고 갑자기 화르르륵
불타올라서 앞치마 끈을 조입니다.
약간의 물을 포글포글 끓여서 오트밀을 조금 투하하고 중불에서 익히는 동안 냉장고에서
두유와 쪄둔 단호박을 꺼내서 핸드 블랜더로 갈아줍니다. 당도가 별로 높지 않은 단호박
이었다는게 기억나서 꿀도 조금. 두유마저도 엄마가 무설탕 두유로 사오시니까 딱 콩물
그맛 뿐이라서.
렌즈콩 통조림을 따서 소금기를 제거하고 익기 시작한 오트밀에 단호박 퓨레와 함께
부어주고선 자아도취에 젖어 있는데 아빠가 뭐 어느새 뒤에서 나타나 계셔요.
"뭐 만들어?"
"영양 꿀꿀이죽."
"그게 요리 이름이야?"
"그럼 Cream of Buttercup Squash Oatmeal Porridge with Lentils."
"그냥 꿀꿀이죽 하자."
적당한 농도가 되었길래 좋아하는 앨리스 스프그릇에 담고 호두를 깨부셔서 가니쉬를
해줍니다. 호두까끼 툴을 쓸때마다 꼭 손가락이 하나씩 으득나요.
냄세는 좋네. 라는 말에 갑자기 울컥.
"냄세만 좋은게 아니야! 이거 엄청 대단한거야."
"으응?"
"렌즈콩은 세계 10대 슈퍼푸드라고. 인도의 등뼈야."
"그래?"
"오트밀은 혈압을 낮춰주고 심장질환과 당뇨를 예방해줘."
"으음."
"그게 다가 아니야. 두유를 넣었으니 아이소플라빈도 풍부해."
"콩 넣었다며 두유는 또 왜 넣어."
"호두도 괜히 들어간거 아니야. 단호박의 베타카로틴은 지용성이라 호두의 오메가-3 와
함께하면 흡수가 잘 되거든."
내가 설명해놓고 내가 얼마나 역사적인 음식을 만든건가 싶어서 감동의 쓰나미가 한없이
몰려옴을 느낍니다. Wheat Bran, 밀겨까지 세스푼 넣었으니 한끼에 식이섬유를 20g 가량
섭취할 수 있다고 열심히 설명하는데 아빠의 표정이 영 시큰하네요.
"아빠도 좀 먹을래?"
"난 그냥 김치에 밥먹을래."
아무도 내 요리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군.
뭔가 시무룩 해져서 스프그릇을 들고 2층 제 방으로 가려는데 - 엄마가 봤으면 제발 식탁
에서 먹어! 하고 화냈을게 분명 - 그냥 너가 즐거워 보여서 아빤 보기좋더라. 라는 말이
뒷편에서 들려옵니다. 역시 아빠의 눈은 정확해요.

노라 존스의
Don't Know Why를 들으면서
무념무상하게 한숟갈 한숟갈 뜨고 있다보니
마음이 놀랄만치 차분해져요.
내가 만들었지만 참 맛있다. 라는 건방진
생각을 하면서 그냥 그렇게 아침을 보냅니다.